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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1,000)/한국여행(충청)

보령시민의 문화를 책임지는 보령문화예술회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산로 77에 가면 보령시청이 위치하고 있는데요. 그곳에는 보령문화예술회관도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령문화예술회관은 대공연장과 소공연장, 전시실, 교양강좌실이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대공연장에는 때마다 의미있는 공연이 열리는 곳입니다. 보령문화예술회관에서 가장 큰 공연장의 좌석수는 818석입니다. 보령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공연의 대부분 가격은 입장료는 R석 1만원, S석 7000원, A석 5000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령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보령시가 지원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구요. 오는 19일 ~ 20일에는 제 13회 한국뮤지컬대상 극본상 수상작에 이름있는 뮤지컬 공연인 오디션이 열립니다. 예매는 2016년 2월 5일 금요일 오후 1시부터 시작했고 문의는 보령문화예술회관.. 더보기
한겨울의 분위기가 좋은 신경섭 고택 신경섭 고택 혹은 신경섭 가옥이라고 불리우는 집은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밭길 62에 있습니다. 보령에서 유명한 휴양림도 그 근처에 있지만 위치상으로 볼때는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죠. 고택에 누군가의 이름이 붙을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유한 사람이던가 그 집에서 살았던 사람이 역사상 유명한 경우에 붙입니다. 이름도 친숙해보이는 아랫징밭사거리를 지하 황룡천을 타고 올라오면 신경섭가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충청남도는 2013년에 자랑할 만한 관광자원은 도내 관광자원 중 최고(最高)·최고(最古)·최대(最大)·최장(最長)·유일(唯一)·특이(特異) 관광자원 55건을 추린 것으로, ‘충남으로 오시오(55)’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관광지를 발표했는데 그중에는 신경섭고택도 있습니다. 신경섭고택의 건물은 그렇게.. 더보기
백제의 마지막을 지켜본 부소산 서울시, 경주시, 공주시, 부여군, 개성시, 평양시 이 여섯개의 도시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한반도에 자리잡았던 국가들의 수도였다는 점이다. 서울은 조선, 경주는 통일신라, 공주는 백제, 부여군 역시 백제, 개성시는 고려, 평양시는 고구려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부여만 시로 승격되지 못하고 군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외부세력에 의해 수도가 공격당하여 패망의 위기까지 처해지면 그 곳은 국가의 색깔을 없애기 위한 작업이 따른다. 임진왜란때 한양은 왜군에 의해 불탔듯이 사비시대를 열었던 부여 역시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에 의해 무너진 후 그 흔적이 깨끗이 지워졌다.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한동안 부여는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여의 부소산.. 더보기
한겨울흰색이 어울리는 추사고택 추사 김정희는 명필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재주를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면서 예산에서 위세 있는 가문으로 자리했다. 추사의 흔적은 예산에도 있지만 유배를 갔던 제주도에도 있다.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승승장구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던 그가 자신만의 추사체를 완성한 것은 유배지에서 였다. 사람은 고난과 고독을 이겨내야 비로서 완성이 되는 모양이다. 예산에 자리한 추사고택은 증조부인 김한신이 부마가 되면서 주면 마을이나 관청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아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서울에도 저택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인물로 서예가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는 불교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더보기
보령과 사람을 이어주는 대천역과 터미널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는 이상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보통 두가지 교통수단을 많이 이용합니다. 기차와 버스인데요. 보령에도 기차가 멈추는 대천역과 보령버스 터미널이 시내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천역은 충청남도 보령시 내항동에 위치한 장항선의 철도역입니다. 이곳 역시 역무실에서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를 찍을 수 있습니다. 보령을 찾는 사람들은 대천과 보령을 조금 햇갈리게 생각하는데요.예전에는 보령군에 속한 대천읍이었다가 1986년에 보령군에서 분리되어 대천시로 불리게 된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에 보령군과 대천시가 통합되면서 보령시로 불리게 된 것이죠. 대천역 역시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옛지명이 익숙하기 때문에 그럴겁니다. 대천역에 오면 .. 더보기
백제와 조선의 마지막을 지켜본 신원사 사찰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 고요함, 절밥, 맑은 공기 같은 것이죠.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신원사동길 1에 위치한 신원사는 동학사, 갑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찰로 꼽히는 곳입니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 (651)에 보덕화상이란 고승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그 이후에 중창하고 보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른 사찰과 달리 산세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어서 사천왕문이 먼저 방문객을 맞이해주네요. 신원사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 80호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석탑양식인 5층석탑이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들어가보았는데 전체적으로 사찰은 천년 도량을 가진 사찰이라고 생.. 더보기
백제흔적이 남겨진 수원사지와 석실고분 공주에는 백제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만 아쉽게도 만들어질 당시의 형태 그대로 남겨진 곳은 많지 않습니다. 고분군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바로 무녕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이지만 그곳말고도 수촌리와 이곳 신관리에도 고분이 있습니다. 대전에서 공주로 들어오는 입구 바로 옆에 있죠. 보통은 그냥 휙하고 지나쳐가죠. 오래된 무덤이라고 해서 고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힘있던 사람들의 무덤이 고분이죠. 충남 공주시 신관동 산14 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6년에 시도기념물 7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신관리 마을의 뒷산 언덕에 위치한 2기의 무덤인데 1967년에 발견되었는데요. 두개의 무덤의 구조양식과 규모는 거의 같으며 돌방무덤(평평한 판돌 2개를 "ㅅ"자형으로 서로 기대어 천장을 만든)라고 합니다. 조금만 걸어올.. 더보기
작지만 강한 여운 '잠자리가 놀다간 골목' 2010년대의 트렌드중에 하나로 골목길 재생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옛날에 형성된 주택가들은 보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우가 많아서 골목길이 좁고 꼬불꼬불 연결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전 개발방식으로 보면 싹 밀어벌이고 반듯하게 구획을 정해서 개발하는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요즘에는 그 형태를 그대로 두고 다시 살리려는 노력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주차하기도 불편하고 도로를 가다가 반대편에서 사람과 마주치면 살짝 몸을 틀어야 하는 경우도 생기는데요. 그 답은 응답하라 1988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추억, 삶, 가치가 그 어떤 금전적인 것보다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주의 중동 농협 뒷골목에 도심 골목길 재생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는데요.그 골목길에서 나오자 마자 이렇게.. 더보기
설화가 내려오는 장소 공주 수원사지 공주를 돌아다니다가보면 사찰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져서 흔적만이 남아 있는 사지가 적지 않다. 백제의 옛수도여서 그런지 몰라도 사찰을 많이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사지로는 동혈사지, 남혈사지, 서혈사지가 있고 국도의 안쪽에 위치해 있어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에 수원사지가 있다. 수원사지는 공주외곽에서 넘어오는 공주터널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한적한 곳이어서 그런지 각종 중장비차량과 건설장비를 실은 차량들이 이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수원사지는 공주 월성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공주시의 진산으로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남부를 연결하는 봉수대가 놓였던 곳이다. 삼남 지방에서 서울로 통신하기 위해 이곳을 거쳐야할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월성산은 수원골, 사당골, 참새골 등.. 더보기
세상의 미련을 버리다. '화순옹주 홍문'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화순옹주(1720 ~ 1758)는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찬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비극에 가까웠다. 충남 예산에 있는 화순옹주 홍문은 그녀의 사후에 정조가 1783년에 열녀문을 세우면서 그녀의 죽음을 조금이나마 애도해주는 공간으로 자리했다. 화순옹주는 영조와 후궁인 정빈 이씨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로 언니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영조의 첫 아들인 효장세자는 여섯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불과 9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화순옹주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는 화순옹주를 낳고 나서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으니 그녀가 의지할 곳은 아버지인 영조뿐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궁궐생활을 하던 화순옹주는 1732년에 영의정 김홍경의 아들인 김한신과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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