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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1,000)/한국여행(충청)

백제의 마지막을 지켜본 부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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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경주시, 공주시, 부여군, 개성시, 평양시 이 여섯개의 도시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한반도에 자리잡았던 국가들의 수도였다는 점이다. 서울은 조선, 경주는 통일신라, 공주는 백제, 부여군 역시 백제, 개성시는 고려, 평양시는 고구려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부여만 시로 승격되지 못하고 군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외부세력에 의해 수도가 공격당하여 패망의 위기까지 처해지면 그 곳은 국가의 색깔을 없애기 위한 작업이 따른다. 임진왜란때 한양은 왜군에 의해 불탔듯이 사비시대를 열었던 부여 역시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에 의해 무너진 후 그 흔적이 깨끗이 지워졌다.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한동안 부여는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여의 부소산에 남이있는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백제시대 사비성의 남아 있는 흔적이다. 사비왕궁이 있는 평지에 사비도성이 있고 후방에 부소산성과 남쪽에는 성흥산성이 방어하는 구조였다. 사비도성은 북조의 낙양성을 벤치마킹해 만든 도시로 금강의 지류인 백마강을 자연 해자 삼고 부소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해 성벽을 쌓는 나성 건축의 형태를 띄고 있는 앞선 고대도시이다. 1년에 두 세번은 꼭 가보는 부소산성은 매번 갈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다. 



부소산성이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 있는 낙화암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의자왕과 삼천궁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 상식처럼 생각되어 졌다. 낙화암과 가까운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은 살짝 가파는 산길이다. 부소산성의 축조기술로 들아가보면 부소산의 지세를 이용해 만든 석축은 성 안쪽은 돌로 쌓고 뒤쪽은 흙으로 쌓아 올렸으며 외곽에 돌을  한 겹 더 쌓아 올려 내부를 보호하는 형태다.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쌓는 판축공법(版築工法)과 잔 나뭇가지와 잎사귀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부엽공법(敷葉工法)은 당시 앞서간 토목공법으로 진동에 대응력이 좋아 지진에도 강했다. 



부여에서 태어나 부여에서 자리잡은 이곳 어르신이 같이 동행을 하며 부소산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부여의 부소산성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낙화암이 이 부근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정확하게 어떤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져서 이곳에 옮겨져 자리했다는 건물이 부소산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사비루라는 이름의 건물은 예전에 백제시대 건물이 있던 자리에서 백마강과 낙화암을 내려다보고 있다. 



부소산이 있는 곳 옆에는 구드레나루터가 있고 그 근처를 구드레 공원으로 조성해놓았다. 구드레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 오래된 지역명이기도 하지만 사비시대에는 이곳은 나루터 수준이 아닌 항구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사비성을 드나드는 외국 사절들이 구드레항을 통해 입국하고 출국을 한 셈이다. 참고로 구드레는 따뜻한 바위라는 구들이 있는 동네라는 이름의 뜻으로 따뜻한 느낌마저 드는 지역명이다. 



오래간만에 방문한 부소산성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의 갑작스런 동행이 반갑게 느껴진다. 사진찍기가 좋은 포인트가 어느곳인지 계속 따라다니면서 알려주고 있다. 이곳에 도읍을 옮긴 성왕에 대한 기록은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서도 등장하는데 “성왕은 천도와 지리에 신묘하게 통달했다“라고 쓰여져 있다.  



조금 내려오니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으로 가면 백제시대때부터 약수로 유명한 고란사로 갈 수 있고 좌측으로 가면 백화정과 낙화암이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도읍이 된 사비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무려 1만여호가 들어섰던 100% 계획도시 사비성은 지금의 세종시와 비교해도 설계의 수준이나 철학적인 측면을 보아도 뒤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에 왕후제를 실시했던 백제는 지방에 왕을 파견하는 22개의 담로제를 실시하고 체계적인 호적제도를 운영했는데 그 중심에는 사비왕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백화정은 이곳 낙화암 위로 건립된 정자로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29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충청남도 문화재 108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자다. 동행을 해주신 어르신은 "과거에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나 삼천명의 궁녀가 아닌 궁인들으로 바꾸어야 할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곳이 한겨울의 낙화암에서 내려다보는 백마강의 절경이다.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였지만 백제가 멸망하고 무려 삼천명의 궁녀가 떨어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낙화암에 새겨진 이야기처럼 의자왕은 방탕한 생활을 즐겼을까. 예로부터 충청과 전라지역은 한반도의 곡창지대로 그 역할을 해왔다. 식량생산이 많아지면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한 예술을 발전시키고 술문화도 자연스럽게 발달한다. 백제의 기술수준이 다른 국가들과 다른 이유는 그런 풍요로움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의자왕이야기는 고려의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서 등장한다. 백제가 패망하고 신라의 역사관이 오랜 세월 지난 상태에서 중립적인 시각으로 백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저 아래 보이는 백마강은 어제의 그 백마강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강물이 흘러들어 저 바다로 나아간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660년 백제가 패망하던 그날의 기억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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