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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1,000)/한국여행(충청)

이괄의 난을 제압했던 논산의 맹장 김완장군의 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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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는 이괄의 난이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난이었습니다. 공주로 피신까지 하면서 전국가적으로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공을 세웠던 인물이 논산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삶에서 가장 큰 이견은 논공행상에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인정받으려다보면 주려는 사람과 받으려는 사람은 관점의 차이를 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 차이는 작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큰 차이를 만들어내게 합니다. 크게는 조선시대에 반정이나 개국공신들에게서의 논공행상이 거론되기도 하고 선거에서 이기면 자리를 하나씩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개개인으로 본다면 사사로이 지위나 돈을 버는 것에 있습니다. 

 


반정 등에 성공을 했지만 논곤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으로 자리에 올라선 인조를 공주까지 밀어냈으며 결국 병자호란의 빌미까지 만든 이괄의 난은 대표적인 난입니다.

 

 

 

 

논산과 공주의 끝자락에 자리한 이곳의 학성군 김완장군 영당은 이괄의 난을 제압한 사람중 한 명입니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이곳에는 논산의 또 다른 인물이 잠들어 있습니다. 

 

 

김완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 장군과 함께 세상에 알렸으며 광해군 7년 (1615년) 과거에 급제하고 고사진 절도사를 거쳐 창성방어사라 있을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김완장군 영당이 이곳에 자리하게 된 것은 그의 손자인 운산공(김세중)이 해남에서 태어나 외가인 공주를 자주 왕래하다가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해김씨 운산공파 중시조가 되었으며 세상을 떠났을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고 합니다. 

 


김해김씨는 저 아래지방인 김해가 시작이었습니다. 김해에서도 그 유명한 김수로왕에서 시작되었으며 초기가야의 맹주이기도 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과한 욕심에서 비롯이 된 것입니다. 난을 일으켰던 이괄은 40여 명을 이끌고 광주를 거쳐 이천 묵방리에 이르렀습니다. 이날 밤 반란군의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 등은 이괄과 아들 이전, 한명련 등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투항하면서 이렇게 해서 이괄의 반란은 평정됐다고 합니다.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장만과 정충신, 김완, 남이흥 등 32명을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봉되게 됩니다. 

영당을 찾아서 안쪽으로 들어가봅니다. 

 


현종과 숙종 시대에 절충장군 맹산현감 운산군수 가선대부 중추부사 병마첨절제사를 거쳐 이곳 운산공파에 김완장군 손자인 운산공이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논산과 공주의 경계가 명확하지만 당시에는 공주와 논산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을때였을 것입니다. 공주에 속했다가 논산에도 속해 있던 곳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논산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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